은하33(2026)년 10월 17일
장편사화 《별자취》 (1) 첫 불빛

제 1 장 첫 불빛

〔속 담〕 시작이 반이다.

(1)

은하29(2022)년 12월 28일, 아직 이름패도 달리지 않은 방송실에 불 하나가 켜졌다.

겨울이였다.

창밖에는 이른 어둠이 내려앉고 가는 눈발이 가로등불빛 속을 느릿느릿 헤염치고있었다.

스위치를 올린 사람은 이 방의 임자인 강지동지였다.

이날 강지동지께서는 낮내내 상자를 나르고 선을 잇는 일로 시간을 보내시였다.

해가 기울어서야 마지막 선 하나가 모니터뒤에 꽂혔다.

이 건물의 다른 창문들은 벌써 어둠에 잠겨있었다.

그 어둠속에서 불을 밝힌 창문은 이 방 하나뿐이였다.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마이크가 달린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아직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모니터 한대가 세간의 전부였다.

벽은 하얗게 비여있었고 문에는 이름패를 걸 자리만 네모지게 남아있었다.

새로 칠한 벽에서는 아직 페인트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강지동지께서는 한동안 문턱에 서서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려온 방이였다.

그런데 막상 불을 켜고보니 생각보다 훨씬 고요하고 훨씬 넓었다.

이 방에서 앞으로 울려나올 목소리를 한사람, 두사람, 열사람… 헤아려보던 강지동지께서는 가볍게 머리를 저으시였다.

헤아림은 나중에 할 일이였다.

지금은 첫 칸을 곧게 세우는것이 먼저였다.

호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책상우에 펼치시였다.

거기에는 굵은 글씨로 다섯글자가 씌여있었다.

《스텔라이브》.

번듯한 이름패는 미처 맞추지 못하였으므로 종이를 그대로 문에 붙이기로 하시였다.

테프를 떼여 네귀를 꾹꾹 눌러붙이고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종이가 삐뚜름하였다.

다시 떼여 바로 붙이시였다.

이번에는 곧았다.

(그래, 이름부터 곧게 서야지.)

강지동지께서는 창가로 다가서시였다.

그사이 눈발은 멎고 갈라진 구름틈으로 별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있었다.

별은 하나로는 점이고 둘이면 선이며 열이면 별자리가 된다.

언제 어데서 마음에 새겼는지도 모를 말이 입속에서 조용히 되새겨졌다.

오늘 켠 불은 겨우 점 하나였다.

그러나 점이 있어야 선을 그을수 있고 선이 있어야 모양이 그려진다.

방 한쪽 벽에는 이름패보다 먼저 걸어둔것이 있었다.

새해 달력이였다.

강지동지께서는 이달 장을 넘기시였다.

1월의 칸들이 하얗게 펼쳐졌다.

붉은 색연필을 쥐고 7일 토요일 칸에 동그라미를 천천히 그리시였다.

《열흘뒤.》

혼자말이 빈 방안에 낮게 울렸다.

그 동그라미는 아직 작았으나 후날 이 방에서 그려질 수많은 동그라미의 첫번째였다.

불을 켜고 이름을 걸고 날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날 강지동지께서 하신 일은 이것뿐이였다.

후날 사람들은 이날을 스텔라이브가 세상에 이름을 건 날로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 그 방에 있던 사람에게는 켜야 할 불이 하나 있었고 그 불을 켠 하루가 있었을뿐이다.

방을 나서려던 강지동지께서는 스위치에 손을 얹었다가 도로 거두시였다.

《불은 켜두자. 누가 오더라도 어둡지 않게.》

그날 밤 방송실의 불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눈 그친 거리에서 올려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창문 하나가 별처럼 노랗게 떠있는것을 보았을것이다.

(2)

새해가 밝았다.

강지동지께서는 그동안 마이크의 높이를 세번 고치고 의자의 방향을 두번 바꾸고 모니터의 밝기를 몇번이나 다시 맞추시였다.

어느 하나 대단한 일은 아니였다.

그러나 처음 오는 사람이 앉을 자리라고 생각하니 하나도 소홀히 할수 없었다.

첫 방송을 이틀 앞둔 날 낮에 강지동지께서는 차잔 두개를 사다 책상 한쪽에 놓아두시였다.

하나는 자신의것이고 하나는 처음 오는 사람의것이였다.

그날 저녁, 방송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찬 밤기운을 어깨에 묻히고 들어선 사람은 유니동지였다.

유니동지께서는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에 붙은 종이를 한참 바라보시였다.

《스텔라이브.》

소리내여 읽어보고는 입가를 슬며시 올리시였다.

《이름패는 아직 없군요, 사장동지.》

《곧 달아야지요. 그래도 이름은 벌써 붙어있습니다.》

강지동지의 대답에 유니동지께서 소리없이 웃으시며 안으로 들어서시였다.

책상앞에 앉아 헤드폰을 쓰시고 마이크를 입가에 맞추시였다.

강지동지께서는 보리차를 따른 차잔 하나를 유니동지의 손에 쥐여주시였다.

잔의 온기가 손바닥에 천천히 번져갔다.

오늘은 소리를 시험해보는 날이였다.

《아, 아. 들립니까?》

《들립니다. 아주 잘 들립니다.》

강지동지의 목소리가 방 저쪽 구석에서 울려왔다.

소리시험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유니동지의 두손이 어느새 무릎우에서 서로를 감싸쥐고있었다.

마주 비벼도 손끝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강지동지께서 그것을 눈여겨보시였다.

《긴장되면 손부터 식지요.》

《사장동지께서도 그러십니까?》

《며칠전에 저 스위치를 올릴 때 한참 서있었습니다.》

유니동지께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시였다.

웃음소리는 하얀 벽에 부딪쳐 되돌아왔다.

이 방에서 울린 첫 웃음이였다.

《사장동지, 저는 잘하려고 하기보다 끝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유니동지의 말씀은 낮았으나 또렷하였다.

《그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고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강지동지께서는 그렇게만 대답하시고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이만한 말로도 두사람의 약속은 넉넉히 맺어졌다.

소리시험을 마친 뒤 강지동지께서는 몇가지 일러두고 방을 나서시였다.

《래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십시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문이 닫히고 유니동지께서 혼자 남으시였다.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유니동지께서는 의자등받이를 천천히 쓸어보시였다.

등받이는 아직 새것의 빳빳함을 간직하고있었다.

(내가 첫번째라면 내 뒤에 올 사람들은 내가 밟은 자리를 따라 걷게 되겠지.)

(길이 울퉁불퉁하면 뒤에 오는 사람이 넘어진다. 첫걸음을 허투루 뗄수는 없다.)

창밖에서는 그날도 별 하나가 깜빡이고있었다.

유니동지께서는 아직 《맏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여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그 이름을 받아안고있었다.

(3)

은하30(2023)년 1월 7일 토요일이 되였다.

스텔라이브가 세상에 이름을 건 때로부터 꼭 열흘이 지난 날이였다.

방송실의 벽시계는 시작시각까지 한시간을 남기고있었다.

유니동지께서는 그 한시간동안 첫인사를 소리없이 입속으로 되뇌이시였다.

마음을 앉히려는 몸짓이였다.

방안에는 두사람이 있었다.

마이크앞의 유니동지, 그리고 구석 의자에 말없이 앉은 강지동지였다.

모니터에는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대화창이 하얗게 비여있었다.

시계바늘이 눈금에 가까워질수록 방안의 공기는 팽팽히 당겨졌다.

《준비되면 시작하십시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강지동지께서는 이 한마디밖에 하지 않으시였다.

유니동지께서 숨을 길게 들이쉬시였다.

그리고 방송을 여시였다.

이렇게 하여 스텔라이브의 첫 성원, 유니동지의 첫 방송이 시작되였다.

몇번이나 속으로 되뇌인 첫인사가 마침내 목소리가 되여 방안에 울려퍼졌다.

대화창은 한동안 조용하였다.

첫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첫인사를 받는 사람도 숨을 죽이고있는듯하였다.

유니동지의 손끝이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이 소리가 정말 가닿고있을가…)

바로 그때였다.

고요하던 대화창에 글줄 하나가 떠올랐다.

《들립니다!》

단 네글자였다.

흰 바탕의 화면에서 그 글줄이 또렷이 빛났다.

손끝이 식은 유니동지에게 그 네글자는 따뜻한 물과도 같았다.

유니동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엊그제 이 방에서 사장동지와 주고받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뒤이어 한줄, 또 한줄 글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 시각 어느 집 책상앞에서, 겨울바람을 막아앉은 어느 방안에서 낯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소리에 귀를 모으고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후날 이 목소리를 따라 먼길을 함께 걸어올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는것을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유니동지의 손끝에 슬며시 온기가 돌았다.

얼었던 손이 눈 녹듯 천천히 풀려갔다.

구석 의자에서 강지동지께서는 눈길을 모니터에 둔채 두손을 천천히 마주잡으시였다.

방송을 대신 해줄수는 없어도 곁에 앉아있을수는 있다는것을 이분은 알고계시였다.

그래서 방송이 이어지는 내내 단 한마디도 보태지 않으시였다.

방송은 흘러가고 창밖의 어둠은 깊어갔다.

이윽고 모니터가 어두워지고 방송실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벽시계의 초바늘소리가 새삼스럽게 크게 들렸다.

유니동지께서 헤드폰을 벗고 몸을 돌리시였다.

《사장동지, 손이 풀렸습니다.》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잘 들렸습니다.》

《오늘 이 방의 불은 유니동지가 다시 한번 켜준셈입니다.》

책상우의 두차잔은 어느새 식어있었으나 두분은 새로 따를 생각도 하지 않으시였다.

유니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였다.

《사장동지, 이 별은 저 혼자 띄운것이 아닙니다. 맨 처음 글을 올려주신 분이 계셨으니까요.》

《그래서 별은 혼자 뜨는법이 없습니다.》

강지동지께서는 벽에 걸린 달력앞으로 가시였다.

7일 칸의 붉은 동그라미우에 색연필로 작은 별 하나를 그려넣으시였다.

첫 별이였다.

두분은 나란히 창가에 서시였다.

밤하늘은 맑게 개여있었다.

열흘전 강지동지께서 홀로 올려다보던 그 하늘이였다.

유니동지께서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시다가 조용히 물으시였다.

《사장동지, 이 별에도 곁이 생기겠지요?》

《그럼요.》

강지동지께서는 몸을 돌려 달력을 한장 한장 넘기시였다.

2월, 3월, 4월, 5월…

그리고 6월장에서 손가락을 멈추시였다.

말없이 6월 10일 칸을 가리키시였다.

그날은 한날에 네사람이 이 방의 불빛을 이어받게 될 날이였다.

《6월 10일…》

유니동지께서는 그 날자를 입속으로 가만히 되뇌여보시였다.

그날을 향한 기다림은 쓸쓸하지 않았다.

이제 이 방의 불은 번져갈 불씨가 되였기때문이다.

별이 걸어간 자리에는 빛의 줄이 남는다고 한다.

그 줄을 별의 자취라 부른다.

이날 방송실의 창문에서 그어진 가느다란 줄이 후날 열별의 궤도로 이어질 첫 자취였다.

여울별

추천하기 되돌이

답변글을 남겨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