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졸업의 아침
〔속 담〕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
(1)
12월 2일 아침, 졸업방송을 몇시간 앞두고 성원들의 손전화마다 같은 글줄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 꼭 봅시다.》
보낸이는 강지동지였다.
은하31(2024)년의 마지막달, 첫 월요일 아침이였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 눈이라도 뿌릴듯하였다.
아침부터 공기가 눅눅히 가라앉아있었다.
이날 저녁 한동지께서 졸업방송을 끝으로 새 길에 나서시는것이였다.
칸나동지였다.
스텔라이브의 성원으로서 처음으로 단독무대 《KANNA》를 여시였던분, 뒤에 오는이들에게 《우리도 설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신분이였다.
잠시 뒤 강지동지의 글줄이 한줄 더 올라왔다.
《졸업은 학교를 마치고 더 큰 길로 나서는 일입니다. 오늘은 웃는 얼굴로 배웅합시다.》
읽은 사람마다 그 글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아쉬움이 컸으나 그 우에는 고마움이 먼저 놓여있었다.
책을 덮는 손은 서운해도 책장사이에 꽂아둔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유니동지께서는 글줄을 읽고 한동안 창가에 서계시였다.
유리에 이마를 대자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거리의 가로수는 잎을 모두 떨구고 마른 가지로 낮은 하늘을 받쳐들고있었다.
열달전 1월의 그날이 눈앞에 떠올랐다.
화면앞에 앉아 칸나동지의 첫 단독무대를 지켜보며 (저 무대가 앞으로 오는 사람들앞에 놓인 첫 디딤돌이다) 하고 속으로 되뇌이던 밤이였다.
유니버스의 네동지께서도 저마다의 방에서 이날 아침을 맞고계시였다.
히나동지께서는 칸나동지에게 보낼 글줄을 열번이나 고쳐쓰시였다.
끝내 남은것은 한마디였다.
《고맙습니다.》
마시로동지께서는 노래도 부르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시였고, 리제동지께서는 칸나동지께서 단독무대를 열던 날의 일을 곰곰이 떠올리시였으며, 타비동지께서는 방송도 켜지 않은채 가만히 앉아계시였다.
3기의 네동지께서는 지난 5월 첫 방송을 앞두고 칸나동지께서 보내주셨던 그 짧은 글줄을 지금도 잊지 않고계시였다.
린동지께서는 벽에 걸린 달력의 12월 2일에 동그라미를 치시였다.
펜끝에 힘이 들어가 달력종이가 살짝 패였다.
오래도록 기억할 날에 치는 동그라미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괜히 목청을 가다듬으시였고 나나동지께서는 농담을 하려다 입을 다무시였다.
리코동지께서는 소매끝으로 눈굽을 훔치시였다.
아침이 깊어가자 마시로동지께서 대화방에 한가지 제안을 올리시였다.
《각자 한마디씩 적어서 한장으로 엮어드리면 어떨가요?》
《좋은 생각입니다.》
《저는 고맙다는 말밖에 못 쓰겠습니다.》
《그 말이면 충분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홉성원의 짧은 글들이 마시로동지의 화면에 모였다.
길게 쓴이도 있고 한줄로 그친이도 있었으나 그 글들은 한결같이 따뜻하였다.
《먼저 길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적은 유니동지의 글이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첫 방송날 보내주신 글줄을 지금도 간직하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적으시였다.
리코동지의 글은 《앞으로도 늘 응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였다.
마시로동지께서는 그 글들을 한장으로 곱게 엮어 칸나동지에게 보낼 준비를 마치시였다.
마지막으로 글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더 읽어보시였다.
점심이 지날무렵 열성원의 대화방에 칸나동지의 글줄이 올랐다.
《그동안 정말 고맙습니다. 저녁에 웃는 얼굴로 만나요.》
이어 강지동지에게는 따로 한줄이 닿았다.
《사장동지께서 열어주신 길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지동지께서는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시다가 답글을 치시였다.
《길은 칸나동지가 걸어서 낸것입니다. 그 길을 뒤에 오는 사람들이 걷게 될것입니다.》
해질무렵까지 강지동지께서는 불을 켜지 않은 방송실에 홀로 앉아계시였다.
창밖의 하늘은 서서히 짙은 재빛으로 가라앉았다.
은하29(2022)년 겨울 빈 방에 불 하나를 켜던 날로부터 지금껏 걸어온 길이 어둠속에서 한눈에 들어오는듯하였다.
벽시계의 초바늘소리만이 또박또박 방안을 채웠다.
저녁이 되였다.
방송실마다 불이 켜졌다.
그날 밤 방송에서 오간 말들은 화면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새겨두었을것이다.
방송이 끝난 뒤 열성원의 대화방에는 같은 글줄이 거듭 올랐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날 밤 도시의 수많은 창가에 불빛이 켜졌고 그 창가마다 같은 화면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있었다.
창밖에는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눈은 배웅하는 손길처럼 새 길로 나서는이의 어깨우에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2)
열아흐레가 지난 12월 21일 토요일, 공연장의 대기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불이 켜져있었다.
오늘은 유니동지의 첫 단독공연이 열리는 날이였다.
데뷔한지 두해가 다 되여서야 마련한 단독무대였다.
거울앞에 앉은 유니동지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처음 불을 켜고 길을 닦던 날들은 쉽지 않았다.
전날 밤 유니동지께서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시였다.
데뷔하던 날 마이크앞에서 식어버렸던 손이 다시 식어가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밤중에 열린 대화방에는 후배들이 남겨놓은 글줄이 쌓여있었다.
읽고 또 읽는 사이에 손끝이 조금씩 데워졌다.
복도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소리가 오가고있었다.
문틈으로 새여드는 불빛이 거울을 비스듬히 가르며 지나갔다.
탁자우에는 마이크가 놓여있었다.
검은 몸체가 불빛을 받아 은은히 윤을 냈다.
유니동지께서는 마이크를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한번 두드려보시였다.
그리고 두번, 세번.
(이것이 앞서 무대에 서신분의 버릇이였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앞선이가 남기고간 작은 버릇 하나가 이렇게 뒤에 오는 사람의 떨림을 달래준다는것이 신통하였다.
손전화기에는 후배들의 글줄이 새로 들어와있었다.
《유니 선배동지, 오늘은 저희가 맨 먼저 박수를 치겠습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선배동지의 방송은 언제나 든든했습니다.》
《끝나고 맛있는것 먹으러 가요!》
《선배동지가 걸으시는 길을 저도 언젠가 따라 걷고싶습니다.》
유니동지께서는 후배들의 글줄마다 일일이 답을 쓰시였다.
손가락이 자판우에서 쉴새 없이 움직였다.
《아침은 챙겨먹었어요? 나는 괜찮으니 여러분이나 따뜻하게 입고 오세요.》
제 떨림보다 남의 끼니가 먼저 걱정되는 맏이였다.
강지동지의 글줄은 마지막에 닿았다.
《첫 성원이 서는 첫 단독무대입니다. 마음껏 하십시오.》
유니동지께서는 그 글줄을 오래 들여다보시다가 천천히 일어나시였다.
거울속의 얼굴이 한결 단단해져있었다.
무대로 나서기 직전, 유니동지께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속으로 말씀하시였다.
(뒤에 오는 모든 별들에게도 이 길이 넓고 편한 길이 되게 해주세요.)
열아흐레전 칸나동지께서 나서신 새 길과 오늘 유니동지께서 들어서시는 무대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있었으나 한뿌리에서 갈라져나온 길이였다.
무대 저편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웅성임이 낮은 물결처럼 밀려왔다.
막이 올랐다.
(3)
눈이 몇번 내리고 그칠 동안 새해가 밝았다.
달력의 첫장이 넘어가고 은하32(2025)년의 첫 한달이 소리없이 저물어갔다.
그사이 아홉성원이 된 스텔라이브의 방송실마다 불빛은 변함없이 켜졌다.
1월 25일 토요일 밤, 강지동지의 실시간방송에 불이 켜졌다.
여느때처럼 소탈한 목소리로 근황을 이야기하시던 강지동지께서 문득 말을 끊으시고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시였다.
《오늘은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대화창이 일순 조용해졌다.
흘러가던 글줄이 멎고 입력중이라는 표시만 깜박였다.
《스텔라이브에 새 식구를 맞으려 합니다. 4기생을 모집합니다.》
다음 순간 대화창은 터지듯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올라오는 글줄을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웠다.
강지동지께서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으시였다.
《새로 오는 사람들은 앞서 걸으신분들이 닦아놓은 길우에 또 하나의 새 길을 내러 오는 사람들입니다.》
화면밖에서도 반응이 이어졌다.
유니동지께서는 화면앞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였다.
오래도록 앞장서온 맏이의 귀에 비로소 뒤따르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
유니버스의 대화방에서는 타비동지께서 먼저 입을 떼시였다.
《또 후배가 생기는구나. 선배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는데.》
《제대로라는게 어떤건데?》
히나동지의 물음에 타비동지께서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하시였다.
《일단 밥은 사주는것 아닐가.》
마시로동지와 리제동지의 웃음소리가 대화방에 번졌다.
3기의 방에서는 린동지께서 말없이 달력의 1월 25일에 또 하나의 동그라미를 치시였다.
리코동지께서는 선배라는 낱말이 아직은 자기에게 헐렁한 옷같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러나 그 옷에 몸을 맞추어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것도 어렴풋이 느끼시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대화방에 문득 이런 말을 올리시였다.
《후배들이 오면 이 방부터 환하게 해두겠습니다. 선배 방이 환해야 첫인상이 좋으니까요.》
그 말에 나나동지께서 배를 쥐고 웃으시였다.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후배를 위해 벌써 방단장부터 하시는것입니까?》
《첫인상이란 방에서 나오는법입니다.》
강지동지께서는 방송을 마치시기 전에 한마디를 더 보태시였다.
《새 얼굴은 나중에 와도 좋습니다. 목소리가 먼저 오면 얼굴은 천천히 따라오는법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유니동지께서는 자기의 첫 방송날 밤을 문득 떠올리시였다.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사람들에게 닿던 밤이였다.
이 모집은 이날부터 모두 다섯차례 이어지게 된다.
새 얼굴을 기다리는 글줄이 대화창에 하나둘 늘어갔으나 새 이름이 오기까지는 아직 한해가 넘는 기다림이 남아있었다.
그사이 먼저 찾아온것은 한동지의 새 모습이였다.
여울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