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33(2026)년 10월 17일
장편사화 《별자취》 (7) 열별의 궤도

제 7 장 열별의 궤도

〔속 담〕 티끌모아 태산이다.

(1)

12월 20일 이른 새벽, 고양시의 큰 공연장 지붕우에는 아직 별이 몇개 남아있었다.

은하32(2025)년 겨울의 토요일이였다.

공기는 얼음처럼 맑았고 입김은 하얗게 피여올랐다.

공연장 정문앞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강지동지였다.

불이 켜지지 않은 공연장은 커다란 어둠의 그릇 같았다.

강지동지께서는 천천히 객석 사이로 걸어내려가 무대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빈 객석, 이곳이 몇시간 뒤면 파스텔들의 불빛으로 가득 찰것이다.

강지동지께서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 눈을 감으시니 비여있는 자리마다 앞으로 채워질 얼굴들이 하나하나 겹쳐지는듯하였다.

밤새 조명을 맞추고 소리를 시험하던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인사를 건네오자 강지동지께서는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수고했다고 말씀하시였다.

이 무대는 열별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을 지키는 수많은 손들이 올리는 무대였다.

은하29(2022)년 겨울, 이름패도 달리지 않은 빈 방송실에서 불 하나를 켜던 날을 강지동지께서는 떠올리시였다.

그 불 하나가 이만한 조명으로 자라기까지 세해가 걸렸다.

그 세해의 마디마디가 눈앞을 스쳐갔다.

유니동지께서 첫 불빛을 이어받아 방송실을 밝히시던 밤, 한날에 뜬 네별, 단독무대의 막이 오르던 겨울, 다시 열린 모집창, 두별이 하나로 이어진 가을.

강지동지께서는 천장의 조명을 올려다보며 그 하나하나를 손꼽아보시였다.

헤아릴수록 하루하루가 모두 이 아침으로 이어져있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올무렵, 공연장 앞뜰에 자동차들이 한대, 두대 들어섰다.

차창에 이마를 대고 아직 남은 별을 올려다보는이도 있었고, 눈을 감고 입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이도 있었다.

공연장 둘레에는 이른 새벽부터 찾아온 사람들의 입김이 하얗게 피여오르고있었다.

추위도 그들의 걸음은 막지 못하였다.

오랜 기다림끝에 맞이한 하루여서 새벽의 찬바람마저 설레임으로 느껴졌다.

오늘 이 무대에는 열별이 선다.

한명도 빠짐없이 열별이.

이날 공연의 이름은 《STAR TRAIL》이였다.

밤하늘을 오래도록 찍으면 별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나타난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기때문에 별들이 하늘에 그려놓는 둥근 자국이다.

그것을 별의 자취, 영어로 STAR TRAIL이라고 한다.

점으로 떠있던 별들이 시간을 두고 선이 되고 그 선들이 모여 하나의 궤도를 이룬다.

열별이 걸어온 시간도 그러하였다.

강지동지께서는 무대 한가운데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다가 낮은 소리로 혼자말을 하시였다.

《오늘 이 무대가 첫걸음이 되기를.》

(2)

해가 뜨자 대기실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성원은 유니동지였다.

첫 성원은 오늘도 후배들보다 먼저 와서 대기실의 의자를 가지런히 놓으시였다.

후야동지께서 문을 열고 들어서시자 유니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자리를 권하시였다.

이어 유니버스의 네동지께서, 그뒤로 클리셰의 네동지께서 웃음소리와 함께 들어서시였다.

히나동지께서는 들어서자마자 코노래부터 흥얼거리시였고, 마시로동지께서는 거울앞에서 목을 가다듬으시였다.

리제동지께서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채 숨을 고르시였다.

간식상자를 열어 서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분은 타비동지께서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옷매무시를 살피다가 제 두발을 내려다보며 혼자 웃으시였고, 린동지께서는 대기실 구석구석을 돌며 의자와 탁자의 위치를 바로잡으시였다.

나나동지께서는 누구에게랄것 없이 엉뚱한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시였고 그 농담에 가장 크게 웃으신분은 리코동지이시였다.

총련습을 마친 뒤 마시로동지께서는 빈 객석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말없이 서계시였다.

《이 자리들이 저녁이면 불빛으로 채워진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구만.》

곁에 선 리코동지께서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선배동지들곁에 서서 이 무대를 바라본다는것이.》

《리코동지도 이제 이 무대의 주인입니다.》

린동지의 한마디에 리코동지께서는 수줍게 웃으시였다.

후야동지께서는 유니동지곁에 다가가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유니 선배동지, 무대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저는 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먼저 웃겠습니다. 웃음은 눈물보다 빨리 퍼지니까요.》

후야동지께서는 눈굽이 뜨거워지는것을 느끼며 웃음으로 대답하시였다.

대기실 벽에는 린동지께서 집에서 가져오신 달력장이 걸려있었다.

12월 20일에는 굵은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석달전 가을밤 겨울장에 그려넣던 동그라미를 린동지께서 오늘의 날자에 다시 크게 그려 가져오신것이였다.

총련습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열사람은 저도 모르게 그 동그라미앞에 모여서시였다.

《드디여 오늘이구나.》

히나동지의 말에 마시로동지께서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석달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줄은 몰랐어.》

《나는 어제 한잠도 못잤어.》

리제동지의 고백에 타비동지께서 어깨를 으쓱이시였다.

《그런데 눈은 반짝반짝 하는데. 밤새 방송을 해도 졸지 않을 눈이야.》

웃음소리가 대기실 가득 퍼졌다.

시간이 가까와오자 유니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우리 손을 모읍시다.》

열사람이 둥글게 둘러서서 손을 내미시였다.

맨 아래에는 유니동지의 손이, 그우에 후야동지의 손이, 그우에 유니버스의 손들이, 맨 우에는 클리셰의 손들이 차례로 겹쳐졌다.

손바닥의 온도도, 굳은살이 박힌 자리도 저마다 달랐으나 겹쳐놓으니 어느덧 하나의 온기가 되였다.

손과 손이 겹쳐지는 그 짧은 순간에 열사람의 가슴속에서는 저마다의 다짐이 피여올랐다.

(첫 성원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뒤에 오는이들이 걷기 편한 길이 되게.)

유니동지의 다짐이였다.

(곁에 서있다는것만으로 이렇게 든든할수가.)

후야동지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였다.

히나동지께서는 노래로 인사하리라 마음먹으시였고, 마시로동지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자기 목소리 하나로 오늘 이 무대에 서리라 다짐하시였다.

리제동지께서는 천천히 와도 괜찮았다고, 천천히 왔기에 이 자리에 설수 있다고 생각하시였다.

(밤새 방송도 하는 몸인데 오늘 하루쯤이야.)

타비동지의 속생각은 이러하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두발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으시였다.

(발이 있으니 잘 서있기만 하면 된다.)

린동지께서는 끝까지 흐트러지지 말자고, 나나동지께서는 웃음은 밤에 터뜨리고 지금은 숨부터 고르자고, 리코동지께서는 언젠가 후배가 생기면 오늘 이 손의 온기를 꼭 말해주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시였다.

그 겹친 손들우에 유니동지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 하나를 더 올려놓고싶은 마음이 되시였다.

앞서 단독무대를 여시고 길을 낸 칸나동지의 손이였다.

그 길우를 걸어 열별이 여기까지 온것이였다.

그 고마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강지동지였다.

《시간입니다.》

강지동지께서는 열사람 한사람한사람과 눈을 맞추시고 짧게 말씀하시였다.

《여러분이 걸어온 길이 곧 오늘의 무대입니다. 그 길을 믿고 서십시오.》

열사람은 서로 눈길을 나누시고 대기실을 나서시였다.

(3)

무대뒤의 어둠속에서 열별은 숨을 죽이고 서계시였다.

열사람의 숨소리가 어둠속에서 하나로 모였다.

막 너머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였으나 열사람은 그 고요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불빛의 바다가 숨을 고르며 일렁이고있다는것을 알고계시였다.

새벽차를 타고 먼 곳에서 달려온 사람의 손에도, 이날을 위해 몇달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온 사람의 손에도 불빛이 쥐여있을것이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오랜 기다림끝에 켜진것이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방송실의 불 하나, 한날에 뜬 네별, 첫 단독무대, 두번째 첫인사… 작은 불빛들이 모이고 모여 이 큰 무대가 되였다.

유니동지께서 무대 입구의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세번 두드리시였다.

앞선이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버릇이였다.

그 소리가 열사람의 가슴속에서 똑같은 박자로 울렸다.

열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눈에 담으시니 지나온 세월이 저마다의 눈동자에 비껴있었다.

유니동지의 눈에는 처음 불을 켜던 밤이, 후야동지의 눈에는 석달전 건너온 문턱이, 유니버스의 눈에는 한날에 뜬 여름하늘이, 클리셰의 눈에는 구슬을 꿰던 여름밤들이 어려있었다.

《준비되였습니까?》

누군가 속삭였다.

《네.》

열사람의 대답이 하나로 겹쳐졌다.

그 순간 막 저편에서 함성이 먼저 밀려들었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파스텔들의 목소리가 먼저 와닿았다.

막이 올랐다.

그날 고양시의 KINTEX를 진감시킨 소리는 영상으로 남았다.

한곡한곡이 어떠하였는지는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맡기고 여기서는 막이 내린 뒤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

막이 내리고 열별은 땀에 젖은채 무대뒤 복도로 걸어나오시였다.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숨소리만 가득한 복도에서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가슴은 터질듯이 뜨거웠다.

복도 끝 창밖에는 어느새 별들이 돋아나있었다.

이른 새벽 지붕우에 몇개 남아있던 그 별들이 하루를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것만 같았다.

방송실의 불 하나로부터 여기까지, 점이 선이 되고 선이 궤도가 된 세월이 열사람의 발자국마다 묻어있는듯하였다.

그때 마시로동지께서 가만히 속삭이시였다.

《이제 열이 더 늘어나는 날을 그려봐요.》

《열이 더 늘어나는 날이라…》

히나동지께서 그 말을 되뇌이시였다.

《식구가 늘면 대기실이 좁아지겠는데.》

타비동지의 농담에 린동지께서 점잖게 대꾸하시였다.

《더 큰 대기실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복도에 낮은 웃음이 번졌다.

웃으면서도 열사람은 아직 이름도 얼굴도 알수 없는 새 별들이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불을 켜고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시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두발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말씀하시였다.

《제 발이 이 무대를 처음 밟은 날인데, 후배들 발자국이 더 찍히는 날도 보고싶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복도 끝으로 모였다.

그곳에 강지동지께서 서계시였다.

새 별을 맞는 약속, 그 열쇠를 쥐고계신분이시였다.

여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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