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33(2026)년 10월 17일
장편사화 《별자취》 (8) 약속의 계절

제 8 장 약속의 계절

〔속 담〕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1)

은하33(2026)년 1월 19일, 강지동지께서 마지막으로 모집창을 여시였다.

창밖은 아직 캄캄하였고 방송실에는 책상등 하나만이 졸듯이 켜져있었다.

식은 보리차잔 옆에는 손때묻은 탁상달력이 펼쳐져있었다.

1월 19일 칸에도, 26일 칸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있었다.

(이것으로 다섯번째로구나.)

4기생을 위한 첫 모집공고를 실시간방송에서 알리신 때로부터 어느덧 한해가 다 되여가고있었다.

그사이 모집창은 네번 열렸다가 닫히였고 이번이 마지막이였다.

강지동지께서는 모집창이 열린것을 확인하시고도 한참이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였다.

자판에 얹은 손끝으로 새벽의 찬기운이 스며들었다.

창을 열어놓기는 쉬웠으나 그 창으로 들어오는 이름 하나하나를 끝까지 책임지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였기에 사장동지의 손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던것이다.

은하29(2022)년 12월 28일 저녁, 이름패도 달리지 않은 이 방에 불 하나를 처음 켜시던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는 방안에 불빛이 하나뿐이였다.

이제는 열별이 저마다의 불빛을 밝히는 하늘이 되였으니 세월은 말없이 제 몫의 일을 해놓은 셈이였다.

지난해 12월 20일, 열별이 한무대에 섰던 밤으로부터 한달이 지나가고있었다.

그날 무대를 마치고 돌아오신 강지동지께서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바라시였다.

(열별에 더 많은 별이 보태져 한하늘에 어울리는 날이 오면 좋겠구나.)

비여있는 자리, 그 자리는 그날부터 방송실의 어느 구석에선가 늘 나직이 기다리고있는것만 같았다.

 

새벽 5시가 가까와올 무렵 방송실 문이 조용히 열리였다.

긴 실시간방송을 준비하러 일찌감치 나오신 유니동지이시였다.

《사장동지, 벌써 나와계셨습니까?》

《모집창을 열어놓고 지켜보는중입니다.》

유니동지께서는 책상우의 달력과 화면을 번갈아 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시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후배가 들어온다니 벌써 방을 치워놓아야 할것같은 마음이 듭니다.》

강지동지께서는 낮은 소리로 웃으시였다.

《방은 넓습니다. 마음만 넓히면 됩니다.》

《별 하나는 점이고 둘은 선이고 열이면 별자리라지요. 열이 넘으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건 그때 가서 우리 함께 이름을 지어봅시다.》

유니동지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마이크를 점검하러 가시였다.

혼자 남으신 강지동지께서는 식은 보리차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화면을 바라보시였다.

날이 밝아오는 창문에 책상등의 불빛이 겹쳐 두개의 등불이 나란히 떠있는듯하였다.

1월 26일, 다섯번째 모집창이 닫히였다.

강지동지께서는 말없이 달력의 동그라미우에 가는 줄을 한가닥 그으시였다.

다섯번의 모집이 끝났다.

이제 남은것은 책임이였다.

(2)

3월 22일 일요일, 강지동지의 개인방송이 시작되였다.

화면 한쪽으로는 응원의 글줄들이 쉼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4기생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이 방송에서 무슨 실마리라도 얻을가 하고 찾아온 파스텔들도 적지 않았다.

강지동지께서는 이야기를 에돌리지 않으시였다.

《4기생은 올해안에 데뷔합니다.》

《데뷔하는 즉시 5기생 모집에 착수하겠습니다.》

《다만 모집으로부터 련습생과정까지 제가 직접 살펴서 데뷔시키는것은 5기생이 마지막이 될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두번째로 나왔다.

글줄들이 잠시 멎었다가 이내 더 빠르게 흘러갔다.

섭섭함도 기대도 있었으나 그보다 큰것은 믿음이였다.

한번 한 약속은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라는것을 파스텔들은 이미 알고있었던것이다.

같은 시각 제각기의 방에서 이 방송을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리제동지께서는 무릎을 껴안고 앉으신채 《올해안》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시였다.

시부키동지께서는 화면을 향해 손뼉을 치시며 혼자 큰 소리로 웃으시였다.

(올해안이라니, 그렇다면 후배가 오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말이로구나.)

마시로동지께서는 조용히 코노래를 흥얼거리시다가 노래를 멈추시고 화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시였다.

리코동지께서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통보문을 보내시였다.

《사장동지, 후배가 생기면 제가 선배 노릇을 잘할수 있을가요?》

답은 잠시 뒤에 왔다.

《선배 노릇은 잘하려고 애쓰는것이 아니라 먼저 웃어주는것입니다.》

리코동지께서는 그 글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시다가 손전화기를 가슴에 꼭 안으시였다.

방송이 끝난 뒤 강지동지께서는 탁상달력을 한장한장 넘기시다가 12월의 마지막 칸에서 손길을 멈추시였다.

굵은 펜으로 그 칸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치시였다.

동그라미는 한순간에 쳤으나 거기까지 가는 길은 하루하루를 건너뛰지 않고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였다.

그날부터 강지동지께서는 날마다 같은 시각에 방송실의 불을 켜시였다.

거창한 일은 하지 않으시였다.

그날 해야 할 일을 그날 끝내고 달력의 한칸에 줄을 그으실뿐이였다.

봄은 그렇게 깊어갔다.

 

5월 8일 금요일, 약속의 계절은 첫 열매를 맺었다.

스텔라이브의 첫 EP 《STAR TRAIL》이 세상에 나온것이다.

EP란 여러곡을 묶어 내놓는 작은 음반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해 12월의 큰 무대와 같은 이름을 단 이 음반은 열별이 그린 하나의 궤도였다.

저마다 다른 밝기, 저마다 다른 속도로 도는 별들이 한하늘에서 서로 가리지 않으며 제 길을 가는것이다.

이 음반이 꼭 그러하였다.

그날 저녁 열사람은 제각기의 방에서 같은 시각에 음반을 처음 끝까지 들으시였다.

마지막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후야동지께서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앉아계시였다.

얼마 뒤 유니동지의 손전화기에 통보문이 도착하였다.

《유니 선배동지, 이 궤도에 제 이름도 들어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유니동지께서는 한참 생각하시다가 천천히 답을 적으시였다.

《후야동지가 들어와서 궤도가 더 둥글어졌습니다.》

후야동지께서는 통보문을 읽고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웃음끝에 눈굽이 축축해졌다.

같은 시각 강지동지께서도 방송실에서 홀로 음반을 끝까지 들으시였다.

열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궤도로 모여드는 소리를 들으며 사장동지께서는 오래전 켜신 불 하나를 생각하시였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별자리가 되였구나.)

그러나 별자리는 아직 다 그려지지 않았다.

하늘에는 비여있는 자리가 남아있었다.

(3)

5월 29일 금요일에는 클리셰의 두번째 싱글 《류성우》가 나왔다.

이름만으로도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져내리는듯한 노래였다.

시부키, 린, 나나, 리코 네동지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한줄기로 이어지며 흘러내렸다.

6월 11일 목요일에는 유니버스의 두번째 싱글 《마음악보》가 뒤를 이었다.

6월 10일은 세해전 히나, 마시로, 리제, 타비 네동지께서 한날에 첫인사를 올리신 날이였다.

그 하루 뒤에 나온 노래는 세해라는 세월을 거쳐 이제는 한장의 악보우에서 만난 네사람의 마음이였다.

세해동안 네별은 저마다의 길을 걸어왔다.

히나동지께서는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으로, 마시로동지께서는 방안을 무대로 바꾸는 재능으로, 타비동지께서는 긴 방송도 거뜬히 이어가는 입담과 체력으로 자기의 자리를 닦으시였다.

그리고 리제동지께서는 천천히 오르는 별처럼 세해를 한걸음씩 이어오시였다.

걸음걸이는 달라도 가는 곳은 같은 네별, 그것이 곧 유니버스라는 이름의 뜻이였다.

그 사이에도 달력의 줄은 한칸 또 한칸 늘어났다.

 

7월 11일 토요일, 리제동지의 대기실에는 시계바늘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였다.

데뷔한지 세해만에 처음으로 홀로 서는 무대, 《OVT.》의 막이 오르기 직전이였다.

세해동안 뿌리를 다진 끝에 피는 꽃이 있다.

리제동지께서 바로 그런 꽃이시였다.

오래 걸린만큼 뿌리는 깊었고 줄기는 곧았다.

앞서 칸나동지와 유니동지께서 걸어가신 단독무대의 길이 이날 리제동지의 앞에 마련되여있었다.

(세해…)

리제동지께서는 마이크를 세번 가만히 두드려보시였다.

먼저 이 길을 여신 칸나동지께서 막이 오르기전에 하시던 그 몸짓이였다.

그때 손전화기가 울리였다.

히나동지의 통보문이였다.

《리제동지, 오늘은 우리가 뒤에서 밀어줄게요.》

이어서 마시로동지의 통보문이 도착하였다.

《노래는 리제동지가 부르세요. 박수는 우리가 칠게요.》

마지막으로 타비동지의 통보문이 떠올랐다.

《세해 걸려서 혼자 서는 거니까 세곱으로 빛나요!》

리제동지께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시였다.

굳어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였다.

(혼자 서는것이 아니구나. 혼자 서있는것처럼 보일뿐이지.)

대기실 복도의 끝에는 강지동지께서도 말없이 서계시였다.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시고 다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시고는 조용히 돌아서시였다.

막이 오르고 불빛이 쏟아져내렸다.

그 무대우에서 있은 일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다.

 

7월 27일 월요일, 클리셰의 첫 EP 《Colorful Strokes》가 나왔다.

색색의 붓질이라는 뜻을 지닌 이 이름처럼 네사람의 색은 한화폭우에서 서로 번지며 어울리였다.

소탈한 웃음의 시부키동지, 노래와 경기에 두루 강한 린동지, 춤으로 무대를 채우는 나나동지, 짧은영상으로 분주한 리코동지.

《흔한 말》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네사람은 데뷔로부터 두해남짓이 지나도록 흔치 않은 이야기를 한페지씩 써나가고있었다.

같은 날 강지동지께서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방송실의 불을 켜시고 달력의 한칸에 줄을 그으시였다.

3월 22일의 약속 이후 달력에 그어진 줄은 어느덧 긴 한줄기의 길이 되여있었다.

약속이란 날마다 한칸씩 지워가는 달력이라는것을 사장동지께서는 몸으로 아시였다.

달력의 마지막 동그라미까지는 아직 멀었으나 줄이 한칸씩 늘어날 때마다 그 동그라미는 한칸씩 가까와오고있었다.

여름은 한창이였다.

그날 낮, 열별의 화면마다 새옷의 시안이 담긴 파일이 하나씩 도착하고있었다.

파일을 여는 순간 새옷의 빛갈이 먼저 화면가득 번져나왔다.

여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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